밤새 뒤척인 탓에 재현은 아침부터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어제 은호가 넘어진 애 손을 잡아준 순간, 재현 머릿속엔 다른 손이 겹쳐 떠올랐다. 훨씬 오래전, 훨씬 또렷한 기억. 그 손의 주인은 이든이었다.
재현은 이든을 잊은 적이 없었다. 잊을 수 없었다. 넘어진 사람을 보면 계산 없이 먼저 손부터 뻗던 애, 별거 아닌 일에도 잘 웃던 애, 재현이 유일하게 짱 노릇 안 해도 됐던 애. 그 얼굴, 그 목소리, 그 웃음소리까지도 재현은 지금도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문제는 — 이든은 죽었다는 것.
그 사건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재현은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검은 옷을 입고, 낯선 어른들 사이에서 영정 사진을 올려다보던 순간까지도. 그게 이든의 마지막이었다. 재현은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 이름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은호를 볼 때마다 자꾸 그 얼굴이 겹쳤다.
'말도 안 되지.'
재현은 속으로 스스로를 다그쳤다. 죽은 사람이 돌아올 리 없었다. 게다가 얼굴도, 이름도, 분위기도 완전히 다른 애였다. 닮은 구석이라곤 몇 가지 습관, 몇 번의 웃음 방식뿐. 그런 걸로 겹쳐 보인다는 건 재현 스스로도 우스운 일이었다.
'죄책감 때문이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조금은 편해졌다. 이든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비슷한 구석이 있는 누군가를 볼 때마다 엉뚱하게 발동하는 것뿐이라고. 재현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가방을 챙겼다.
—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재현은 다른 문제와 마주해야 했다.
"재현아." 같은 라인의 성민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2학년 쪽에 좀 소문이 있어."
"뭔 소문."
"동현이 형 라인 애들이 요새 좀 움직인다고. 우리 쪽 애들 몇한테 은근슬쩍 찔러보고 다닌다더라."
동현이라면 재현도 아는 이름이었다. 다른 동네, 다른 서클 소속으로 예전부터 서열 문제로 껄끄러운 사이였던 선배. 재현이 짱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크게 부딪힐 일은 없었지만, 최근 들어 자꾸 선을 넘는 움직임이 보인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뭘 찔러본다는 건데."
"그냥, 재현이 요새 좀 무뎌진 거 아니냐, 그런 식으로." 성민이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너 요새 딴 데 신경 쓴다는 얘기도 나와."
재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딴 데 신경?"
"전학생 있잖아. 걔한테 자꾸 왔다갔다 하는 거, 다들 눈치챘어."
재현은 순간 뭐라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부정할 말이 마땅히 없었다.
"…신경 안 써." 결국 그렇게만 말하고 자리를 떴다.
—
하지만 성민의 말은 사실 근거 없는 게 아니었다. 며칠 새 재현은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신경이 은호 쪽으로 쏠리는 시간이 늘었고, 그만큼 다른 것들에 대한 촉이 무뎌졌다.
그날 오후, 그 대가를 치렀다.
방과 후 골목에서, 동현이 라인 애들 몇이 재현의 라인 후배 하나를 둘러싸고 시비를 붙이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재현이 먼저 감지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연락을 받고 도착했을 땐, 이미 후배가 몇 대 맞은 뒤였다.
"뭐 하는 짓이야." 재현이 도착하자 상황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동현이 라인의 리더 격인 애가 씩 웃으며 물러섰다. "그냥 인사한 거야. 요새 통 안 보이길래."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재현은 그 말의 무게를 정확히 이해했다 — 이건 시작일 뿐이라는 경고.
후배를 부축해 병원에 데려가는 길, 재현은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정신 차려야 해.'
하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 재현의 머릿속엔 다시 그 얼굴이 떠올랐다. 은호의 웃음. 그리고 그 너머에 겹쳐지는,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얼굴.
재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 *(다음 화 예고: 은호, 재현이 짊어진 무게를 은근히 꿰뚫어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