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급식실 앞은 늘 그렇듯 붐볐다. 재현은 줄을 서다 말고 몇 줄 앞에서 벌어진 작은 소란을 봤다.
1학년으로 보이는 애 하나가 식판을 놓쳤다. 국물이 옆에 있던 다른 애 신발에 튀었고, 그 애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뭐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별일 아닌 일이 커지려는 조짐이었다 —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괜히 기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를 재현은 숱하게 봐왔다.
"미안, 내가 발 걸었나 봐."
끼어든 건 은호였다. 정작 발을 건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도, 은호가 먼저 나서서 상황을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짜증 내던 애가 얼떨결에 은호를 보더니, 김이 빠진 듯 그냥 넘어갔다. 1학년 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은호를 봤고, 은호는 아무렇지 않게 식판 치우는 걸 도와주며 웃었다.
"괜찮아, 다음부턴 조심하고."
그 웃음이 문제였다.
계산된 여유도, 시비를 피하려는 영악함도 아니었다. 그냥 반사적으로 나온,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웃음. 재현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그 장면을 몇 초간 더 보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명확한 기억은 아니었다. 얼굴도, 이름도 아니었다. 그냥 그 웃음의 각도, 아무렇지 않게 남의 일에 먼저 손을 뻗는 그 방식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습관 하나를 우연히 다시 마주친 기분.
재현은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냈다.
'몰라. 됐어.'
—
그날 오후, 체육 시간. 반 대항 피구였다. 은호는 운동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공을 피하다가 넘어진 다른 반 애를 보더니 경기 중인데도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심판을 보던 체육 선생이 헛웃음을 지으며 "야, 경기 중이잖아" 하고 핀잔을 줬다. 은호는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재현은 코트 반대편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번엔 부정할 수 없었다.
'또야.'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반사적으로 먼저 움직이는 손. 계산이 끼어들 틈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하는 방식. 재현은 문득 뭔가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저 오래된 무언가.
—
수업이 끝나고, 재현은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자리에 멈춰 서서 은호를 불렀다.
"너."
"어." 은호가 땀을 닦으며 돌아봤다.
"아까 왜 그랬냐."
"뭘?"
"넘어진 애 손 잡아준 거."
은호가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넘어졌으니까."
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 재현은 그 단순함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급식실에서도 그랬잖아. 네 잘못도 아닌데 대신 나서고."
은호의 표정이 아주 잠깐, 미세하게 멈췄다. 재현이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 거 눈여겨보고 있었어?" 은호가 다시 웃으며 넘겼다. "의외로 관찰력 있네, 도재현."
"관찰이 아니라—" 재현이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정확히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은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먼저 갈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재현은 자기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조여드는 걸 느꼈다. 화가 나는 것도, 짜증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
'신경 쓰인다.'
처음으로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왜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
그날 밤, 재현은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문득 어릴 적 기억 한 조각이 스치는 걸 느꼈다. 누군가 넘어진 자신에게 손을 내밀던 장면. 얼굴은 흐릿했다.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 손의 온도만은 이상하게 선명했다.
재현은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았던 기억이었다.
'아니야.'
재현은 그 생각을 억지로 밀어냈다.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 *(다음 화 예고: 재현의 서클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