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안은 결심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밤이 깊어지고 하천의 발소리가 멀어진 뒤, 그는 방문 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지만, 창 없는 방이라도 벽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의 방향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며칠간 눈여겨봐 둔 것이 있었다. 야경을 도는 자들의 순번, 그 틈.
기회는 그날 밤 찾아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 대신, 서리안은 벽을 짚으며 낡은 창살 틈을 비집었다. 오래전 명문가에서 익힌 몸가짐이 이럴 때 쓰일 줄은 몰랐다. 몸을 낮추고, 그림자를 따라 담장까지 다다랐을 때—
"거기까지군."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하천이었다. 팔짱을 낀 채,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한 얼굴로.
"...알고 있었소?"
"처음부터."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네가 순번을 세고 있다는 것도, 오늘 밤을 고른 이유도. 다 알면서 내버려 둔 거다."
서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저항이 아니라, 애초에 놀아난 것이었다.
"...왜."
"보고 싶었으니까. 네가 얼마나 발버둥 치는지."
하천의 손이 그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담장 아래, 달빛조차 닿지 않는 그림자 속으로 그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알려주고 싶었지. 도망칠 수 있다는 착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서리안은 등이 벽에 밀리는 걸 느꼈다. 몸을 빼려 했지만, 하천의 몸이 이미 모든 틈을 막고 있었다.
"놓으시오. 이건—"
"이건 벌이다."
목소리에 조롱조차 없었다. 그저 사실을 말하듯 담담했다.
"물건이 주인 몰래 도망치려 했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그의 손이 서리안의 옷깃을 거칠게 풀어헤쳤다. 차가운 밤공기가 살갗에 닿았다. 서리안은 저항하려 했지만, 하천의 힘 앞에서 그것은 몸짓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볼 거요."
"보라지."
하천이 나직이 웃었다. 즐거움이 아니라, 위협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네가 누구의 것인지, 이 저택 전체가 알아야 할 필요도 있으니."
그 밤, 서리안은 처음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저항도, 자존심도, 마지막 남은 경계선까지도. 하천은 그를 다루는 데 있어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끝난 뒤, 서리안은 담장 아래 주저앉은 채로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
하천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숙여 옷깃을 대충 여며주었다. 다정함이 아니라, 흐트러진 물건을 정리하는 손길이었다.
"다시 이런 짓을 하면."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다음엔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서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하천이 저택 안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그 순간,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보다 다른 감정이 더 크게 남았는지.
그는 그 답을 알고 싶지 않았다. — 같은 시각, 저택 서편의 작은 별채에서는 촛불 하나가 밤늦도록 꺼지지 않고 있었다.
"수장님껜 아직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내가 나직이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자는 대답 대신 서찰을 촛불에 가까이 가져갔다. 문양이 일렁이는 불빛에 잠시 드러났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당분간은 그래야겠지.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그 말과 함께, 서찰은 다시 깊숙한 곳으로 감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