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은 크고 화려했지만, 서리안에게 주어진 방은 그렇지 않았다. 창 하나 없는 작은 방, 겨우 몸 하나 뉠 만한 자리에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서리안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을 맴도는 건 시장에서, 하천이 처음으로 내뱉었던 그 말이었다.
*내 아비와 어미, 형제들의 목을 자른 자들이 네 아비의 손에 쓴 문서 한 장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아무리 곱씹어도 알 수 없었다. 서가가 몰락한 이유는 역모 누명이라고만 들었다. 그 뒤에 다른 사연이 있었다는 것도, 하천의 가문이 얽혀 있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알아본들 무슨 소용인가. 이미 모든 걸 잃은 뒤였다.
다음 날, 문이 열렸다. 하천이었다.
"따라와라."
서리안은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어디로."
"질문은 필요 없다."
"나는 아직 당신이 누구인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오. 그런데 순순히 따르라니, 그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천의 손이 그의 팔을 낚아챘다. 거칠게 끌어당기는 힘에 서리안의 몸이 휘청였고, 그대로 하천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가까이서 본 하천의 눈은 생각보다 더 어두웠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궁금한가."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네가 가진 모든 것. 이름, 자존심, 그 꼿꼿한 등. 서가의 핏줄이 가진 것 전부를 무너뜨리는 것."
서리안의 숨이 짧게 흔들렸다.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그 말이 담고 있는 어떤 열기 때문인지 스스로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놓으시오."
"싫다면?"
하천의 손이 팔에서 등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왔다. 서리안은 그 손길에서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지만, 벽과 하천의 몸 사이에 갇힌 채로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너는 이제 물건이다, 서가의 도련님. 물건은 저항하지 않아."
"나는 물건이 아니오."
서리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격해졌다. 존댓말 밑에 숨겨져 있던 날카로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팔려왔다고 해서 사람이 물건이 되는 건 아니오. 당신이 아무리—"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하천의 손이 그의 턱을 잡아 올렸고, 다음 순간 입술이 겹쳐졌다.
거칠고,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입맞춤이었다. 서리안은 반사적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하천의 팔이 그의 허리를 감아 완전히 가두었다. 벗어날 곳이 없었다.
몸이 떨렸다. 분노 때문이라고, 서리안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런데 그 떨림 어딘가에, 설명할 수 없는 낯선 열기가 섞여드는 것을 그는 애써 외면했다.
하천이 입술을 떼었을 때, 서리안의 눈에는 눈물 대신 분노가 차 있었다. 하지만 그 분노 밑으로, 심장은 지나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비겁하군."
간신히 뱉은 말이었다. 하천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낮게 웃었다. 조롱이 아니라, 어딘가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비겁한 게 아니라, 이게 내 방식이다."
그가 서리안의 뺨을 스치듯 쓸었다. 손끝이 지나간 자리에 소름이 돋았다.
"네가 아무리 등을 곧게 세워도, 결국 무너지는 걸 보고 싶어서."
서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몸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사실만이, 그날 밤 내내 그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 며칠이 지나도록, 하천은 매일같이 그를 불러들였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곁에 앉혀놓기만 했고, 때로는 손끝으로 그의 저항을 시험했다. 서리안은 매번 밀어내려 했지만, 밀어낼수록 하천은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서리안 자신도 눈치채고 있었다. 저항이, 조금씩 무뎌지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
그는 아직 그 답을 알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