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오지 않았지만, 시장 바닥은 온통 젖어 있었다.
핏물인지 진흙물인지 모를 것들이 발밑에서 질척였고, 그 위로 사람들이 짐짝처럼 늘어서 있었다. 서리안은 그중 하나였다.
며칠 전까지 서가(徐家)의 적장자였던 몸이, 지금은 목에 밧줄이 걸린 채 흙바닥에 무릎 꿇려져 있었다. 손목엔 밧줄 자국이 벌겋게 남았고, 사흘을 굶은 배는 진작 뒤틀리기를 멈춘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는 등을 곧게 펴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아직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저놈, 서가의 핏줄이라며?"
경매인의 목소리가 시장 바닥을 갈랐다.
"명문가 도련님이올시다. 글도 읽고 예도 아는 몸이니, 어디 곱게 부릴 몸종으로 딱이지요. 자, 시작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파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필요 없다."
사람들이 술렁이며 갈라졌다. 걸어 나오는 자의 걸음걸이엔 서두름이 없었다. 큰 체구, 어깨에 걸친 검은 장포, 그리고 얼굴에 남은 흉터 하나. 흑룡회(黑龍會)의 수장, 하천(河天)이었다.
시장 전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 바닥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하천은 서리안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마치 물건을 살피듯 그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거친 손끝이 닿는 순간, 서리안의 눈에 처음으로 날이 섰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비틀어 그 손을 피하려 했지만, 하천의 손가락은 이미 그의 턱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놓으시오."
목소리는 낮았지만 떨리지 않았다. 하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놓으라고?"
그는 서리안의 얼굴을 좌우로 천천히 돌려보았다. 상품을 감정하는 손길이었으나, 눈빛만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곱게도 자랐군. 서가의 핏줄답게."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서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가문을... 아시오?"
"알다마다."
하천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온도가 사라졌다.
"내 아비와 어미, 형제들의 목을 자른 자들이 네 아비의 손에 쓴 문서 한 장이었으니까."
서리안은 순간 말을 잃었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가문이 역모에 몰려 하루아침에 멸문했다는 것, 그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모르겠지."
하천이 서리안의 턱을 놓았다. 대신 그 손이 목덜미로, 밧줄이 파고든 자리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손가락이 벌겋게 쓸린 살갗을 천천히 쓸었다. 서리안의 몸이 저도 모르게 굳었다.
"몰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제부터, 네가 알아야 할 건 하나뿐이니."
"...무슨 뜻이오."
하천이 몸을 숙였다. 그의 입술이 서리안의 귓가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부로 넌 내 것이다, 서가의 핏줄."
경매인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수, 수장님. 값을 매기지도 않으셨는데—"
"부르는 대로 주지."
하천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답했다. 시선은 여전히 서리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빛엔 오래 눌러온 무언가가 이제 막 풀려나오려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서리안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이 두려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 저택으로 끌려가는 마차 안, 서리안은 손목에 남은 밧줄 자국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제부터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하천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미 손에 넣은 것을 확인하듯, 여유로운 시선으로.
마차가 덜컹였다. 그 흔들림에 서리안의 몸이 살짝 기울었고, 하천의 손이 뻗어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필요 이상으로 오래, 필요 이상으로 세게.
"겁먹은 얼굴은 아니군."
하천이 나직이 말했다.
"의외로."
서리안은 붙잡힌 팔을 빼내려 했지만, 그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겁을 먹어야 할 이유를 아직 다 듣지 못했으니까."
그 말에 하천이 처음으로,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엔 즐거움과 위험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곧 듣게 될 거다."
마차는 어둠 속을 달렸고, 저택의 대문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