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백결은 집으로 돌아가 오랜만에 서랍 깊숙한 곳의 상자를 꺼냈다. 할머니의 유품이었다. 낡은 방울 하나, 색이 바랜 부적 몇 장, 그리고 손때 묻은 경문 노트.
할머니는 그가 아홉 살 때부터 그를 데리고 다녔다. 정확히는, 그가 남들이 못 보는 걸 보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부모는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그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
"보되, 아는 척은 하지 마라."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네가 뭘 봤는지 티 내는 순간, 그것들이 널 알아본다. 알아보면, 붙는다."
어린 백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몸으로 익혔다.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하고, 존재를 못 본 척하는 법. 그 훈련 덕분에 그는 또래보다 훨씬 무감한 아이로 자랐다. 대학에 갈 무렵엔 이미 스스로도 자신이 진짜 뭘 느끼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할머니는 그가 스물이 되던 해 돌아가셨다. 유품이라고 남긴 게 이 상자 하나였다. 그동안 백결은 이걸 열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볼 때마다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병상에서도 손에서 놓지 않던 낡은 경문 노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남긴 알 수 없는 말.
"결아. 내가 못다 한 게 하나 있다. 언젠가 네가 마주하게 될 거야. 그때는, 눈을 내리깔지 마라."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지 못했다. 할머니는 그날 오후 눈을 감았고, 백결은 줄곧 그 말을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채 살아왔다.
경문 노트를 펼쳤다. 낯익은 진언들 사이로, 처음 보는 문양이 하나 있었다. 손으로 그린 듯 서툰 필체였다. 결계 문양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구조. 그는 그 페이지를 한참 들여다봤다. 왠지 낯설지 않았다.
문득 채령이 떠올랐다. 결계 문양을 그렸을 때 오히려 더 옅어지던 그 반응. 이 노트 속 문양과, 어쩌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다.
그는 노트를 챙겨 나갈 채비를 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그 자신은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