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HARAVERSE STUDIO
하녀 소생 영애는 지켜지고 싶다

03화 · 전체 35화

그림자가 말을 걸다

글 · 힐링아무

연회가 끝난 뒤로, 유설은 이유 모를 불면에 시달렸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도 잠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눈을 감으면 발코니에서 마주 서 있던 백결과 채령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냥 우연이었을 거야.'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불안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 저택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원하는 것은 대부분 손에 넣었고,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해본 기억도 많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낯설고 불쾌한 종류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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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유설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홀로 저택 뒤편 숲길을 산책했다. 시녀들에게는 잠시 혼자 있고 싶다며 물리쳐 두었다.

숲은 저택의 정돈된 정원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무들은 제멋대로 자랐고, 발밑의 낙엽은 밟을 때마다 축축한 소리를 냈다. 유설은 평소라면 발을 들이지 않았을 이 숲길을, 오늘따라 이상하게 계속 걷고 있었다.

"...마음이 많이 어지러우신 모양입니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녀가 숲 깊숙이 들어섰을 때였다. 유설이 놀라 돌아보니, 커다란 고목 아래 한 사내가 나른하게 기대어 서 있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이상하리만치 잘 정돈된 이목구비였다. 짙은 흑발이 이마 위로 느슨하게 흘러내려 있었고, 그 아래 눈매는 서늘하리만치 깊었다. 검은 로브 차림이었지만, 그 아래로 드러난 목선과 손끝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어딘지 우아했다.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다듬어진 조각상을 마주한 듯한 인상이었다.

"누구세요?"

유설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물었다. 경계심이 앞섰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는 낯선 끌림이 먼저 일었다.

"지나가던 나그네입니다."

사내가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다가왔다. 걸음걸이에는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마치 이 숲 전체가 그의 것이라는 듯, 여유로운 속도였다.

"다만... 아가씨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여, 저도 모르게 말을 걸었습니다."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미소는 부드러웠다.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오히려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제갈도진이었다. 흑마법사라는 소문이 왕국 곳곳에 퍼져 있었지만, 이 변경의 저택에서는 아직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근심이라니, 무슨 근심이요."

유설이 애써 담담한 척 답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마다, 묘하게 숨이 얕아지는 것을 느꼈다.

"제가 잘못 봤다면 사과드리지요. 다만,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곳을 바라볼 때의 표정을, 저는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과 닮아 보였을 뿐입니다."

유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그저 짐작입니다. 틀렸다면 잊어주십시오."

도진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려 했다. 그 무심한 듯한 태도가, 오히려 유설의 마음을 붙잡았다. 상대가 자신에게서 관심을 거두려 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붙잡듯 물었다.

"...틀리지 않았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오히려 낯선 이였기에, 그리고 그 낯선 이가 지나치게 매력적이었기에, 더 쉽게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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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유설의 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나란히 걸었다. 그 거리감마저도 계산된 것처럼 편안했다.

"오래 마음에 품어온 분이 계신가 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마치 오래된 벗에게 이야기를 청하듯, 조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몇 년째요. 근데 최근에 그분이 이 저택에, 저와의 혼담 때문에 오셨어요. 그런데—"

유설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 자체가, 스스로 인정하기 싫은 감정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요."

도진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의 미소처럼 보였지만, 그 미소의 결이 아주 미세하게, 즐거움에 가까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유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분 시선이, 자꾸 다른 사람한테 가 있어요. 제 여동생한테요."

"여동생분이라면."

"...제 아버지의 둘째 딸이에요. 어머니가 달라요."

도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동작 하나에도 이상한 우아함이 묻어 있었다.

"흥미롭군요."

"뭐가요?"

"아니, 그저... 그런 사연이 있으셨구나 싶어서."

도진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의 눈빛 깊은 곳에서는, 오래전부터 좇아온 예언의 조각과 방금 들은 이야기가 서서히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손끝에서 빛이 나온다는 소문의 소녀, 하녀 소생의 둘째 딸. 그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존재였다.

"...그 여동생분, 혹시 몸에 특이한 점은 없으십니까?"

도진이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다정한 호기심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특이한 점이요? 그러고 보니..."

유설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어릴 때부터 손끝이 이상하게 뜨거워진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저도 몇 번 봤어요, 화가 났을 때 손끝에서 옅은 빛이 나는 걸."

도진의 눈빛이 미세하게 반짝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반짝임에는 지금까지의 부드러움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 스쳐 지나갔다. 유설은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군요."

그의 목소리는 다시 태연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세요?"

"아, 아닙니다.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라 여쭤봤을 뿐입니다."

도진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 자연스러움이 지나치게 매끄러워서, 유설은 오히려 아무런 의심도 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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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의 마음,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는 없겠지만."

도진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유설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상대를 홀릴 만큼의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정리할 필요는 있겠지요."

"방해가 되는 것들이요?"

"예를 들면... 그 기사님의 시선을 흐트러뜨리는 존재. 혹은, 아가씨 스스로도 몰랐던 여동생분의 숨겨진 진실 같은 것들 말입니다."

유설은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술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술렁임 뒤에는, 이 낯선 사내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때가 되면 아시게 될 겁니다. 다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도진이 품에서 작은 손거울 하나를 꺼내 유설에게 건넸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손에 아주 잠깐 스쳤다. 그저 스치듯 지나간 접촉이었지만, 유설의 심장이 순간 크게 뛰었다.

"이걸 가지고 계십시오. 제 이름을 부르시면, 언제든 목소리가 닿을 겁니다."

유설은 홀린 듯 그 거울을 받아 들었다. 표면은 차갑고, 이상하리만치 매끄러웠다.

"...당신, 정체가 뭐예요?"

도진은 그 물음에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그 미소는 이번에도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그저, 아가씨의 편이 되어드리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숲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걸음걸이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뒷모습조차 어딘가 그림 같았다. 유설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손에 쥔 거울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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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유설은 방으로 돌아와 거울을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낮에 있었던 일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지만, 손끝에 남은 거울의 차가운 감촉만은 선명했다. 그리고 그 감촉 위로, 스치듯 닿았던 도진의 손끝 온도가 자꾸만 겹쳐졌다.

'그저 지나가던 나그네일 뿐이야.'

그렇게 되뇌면서도, 그녀는 서랍을 몇 번이고 다시 열어 거울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채령과 백결이 발코니에서 마주 서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정리할 필요는 있겠지요.'

도진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유설은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이후로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전에는 없던 낯선 씨앗 하나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씨앗을 심은 이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그녀는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였다.

3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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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에서는 도진의 접근이 유설의 일상에 서서히 스며들며, 채령을 향한 첫 번째 작은 악의가 모습을 드러낸다.)*

03화 끝

다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