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HARAVERSE STUDIO
하녀 소생 영애는 지켜지고 싶다

02화 · 전체 35화

우연이 쌓이면

글 · 힐링아무

백결이 저택에 머문 지 보름이 지났다. 애초에 명분으로 내세운 짐승 흔적 조사는 진작에 끝난 뒤였지만, 남작은 혼담을 확실히 매듭짓기 전까지는 그를 붙잡아둘 생각이었고, 백결 역시 별다른 이견 없이 그 뜻을 따랐다.

"기사님이 오래 계셔주셔서 참 든든해요."

유설은 매일 아침 그렇게 말하며 그의 곁을 맴돌았다. 산책길에 우연을 가장해 마주치고, 서고에서 그가 즐겨 찾는 책의 종류를 물어보고, 식사 자리에서는 늘 그의 옆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백결은 그때마다 예의 바르게 웃어 보였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 유설은 그것을 원래 과묵한 성정 탓이라 여기며,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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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령의 하루는 여전히 저택의 그늘 속에서 흘러갔다. 이른 아침의 정원, 낮 동안의 잡일, 저녁 만찬 자리의 말석. 그 사이사이, 하린이 몰래 챙겨주는 다과 한 조각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채령이 정원 창고에서 겨울을 나기 위한 장작을 옮기고 있었다. 하녀들이 손이 모자란다며 부탁한 일이었지만, 정작 저택 누구도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채령은 개의치 않았다. 이런 일에는 이미 익숙했다.

장작더미 위쪽을 정리하려 발판에 올라선 순간, 발판이 삐걱 소리를 내며 기울었다. 채령의 몸이 순간 휘청였고, 위태롭게 쌓여 있던 장작더미가 와르르 무너지며 그녀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위험합니다!"

누군가 그녀를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장작더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쏟아졌다. 채령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낯선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익숙한 은빛 갑옷의 감촉, 백결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얼굴에, 채령은 순간 말을 잃었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한 것이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어, 네... 감사합니다."

그녀가 황급히 몸을 떼며 답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감추려 애써 시선을 피했다. 백결 역시 어색하게 손을 놓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괜찮아요. 그냥... 놀랐을 뿐이에요."

그 뒤로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묘한 정적이 흘렀다. 별다른 대화 없이, 백결은 흩어진 장작을 조용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사의 복장으로 장작을 나르는 모습이 어색해 보일 법도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이런 건 하인들이 할 텐데요."

채령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굳이 이렇게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다는, 일종의 사양이었다.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으니까요."

백결이 장작을 하나씩 쌓아 올리며 담담히 답했다. 그 대답에는 특별한 수사도, 과장된 친절도 없었다. 그저 당연한 일을 한다는 투였다. 그러나 그 담백함이, 채령의 마음 한구석에 낯선 온기를 남겼다. 지금껏 이 저택에서, 그녀를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몸을 움직인 사람은 하린 말고는 없었다.

정리를 마친 백결이 자리를 뜨려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발판이 낡았더군요. 나중에 사람을 시켜 바꿔두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작은 일입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정원을 벗어났다. 채령은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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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채령과 백결은 저택 안에서 종종 마주치게 되었다. 정원에서, 복도에서, 서고에서. 매번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짧은 인사, 몇 마디의 대화, 그리고 서로를 향한 짧은 시선들이 조금씩 쌓여갔다.

어느 날, 서고에서 우연히 마주친 채령이 오래된 지도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백결은 책장 사이를 훑어보다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기사님은 왕도 생활이 지루하지 않으세요?"

채령이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딱히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곳이 더 평온하게 느껴집니다."

"저택이요? 여기가요?"

채령이 의아한 얼굴로 손을 멈추고 되물었다. 이 저택의 숨 막히는 격식과 무언의 규칙들을 매일 견뎌내는 그녀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백결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답했다.

"왕도에서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속내가 늘 다릅니다. 여기서는... 적어도, 솔직한 사람이 있으니까요."

채령은 그 말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잠시 자신에게 머무는 것을 느끼며, 이상하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제가요?"

"틀렸습니까?"

백결이 옅게 웃으며 되물었다. 채령은 대답 대신 다시 지도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 뒤로 한동안, 그녀의 손끝은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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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유설의 불안도 함께 자라났다. 그녀는 원래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데 능한 편이었고, 저택 안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연이라 여겼다. 채령과 백결이 정원에서 몇 마디 나누는 것을 보았을 때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우연이 반복될수록, 유설의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이 쌓여갔다.

"채령, 요즘 기사님이랑 자주 마주치나 보네."

어느 날, 유설이 채령의 방에 불쑥 찾아와 말했다.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저택이 좁아서 그런 거예요."

채령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실제로 그녀는 백결과의 만남을 특별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그렇게 되뇌고 있었다.

"그렇겠지."

유설은 짧게 답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나 그 뒷모습에서, 채령은 이유 모를 서늘함을 느꼈다. 마치 방금 그 말이, 경고에 가까운 무언가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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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저택 외곽 숲길에서는 낯선 그림자 하나가 유설의 뒤를 조용히 밟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걸친 사내, 제갈도진이었다. 그는 몇 주 전부터 이 저택 인근을 배회하고 있었지만, 아직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그는 유설이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 그림자 속에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흔들리기 시작했군."

그의 목소리에는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그는 아직 유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불안이 무르익기를, 마치 잘 익은 과실을 기다리듯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이따금 저택 안쪽, 채령이 머무는 별채 쪽으로도 향했다. 아직 그녀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오래전부터 좇아온 예언의 조각들이 조금씩 이 저택으로 그를 이끌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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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남작이 주최한 작은 연회가 열렸다. 인근 귀족 몇 가문을 초대한, 그리 크지는 않지만 격식은 갖춘 자리였다. 유설은 이날을 위해 며칠 전부터 드레스를 고르고, 몸단장에 공을 들였다.

연회가 시작되자, 유설은 자연스럽게 백결의 파트너로 나서 춤을 청했다. 그는 예의상 이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홀 중앙에서 춤을 추는 동안, 채령은 늘 그렇듯 연회장 구석, 시선이 닿지 않는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춤이 끝난 뒤, 유설은 다른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다. 백결은 목이 마르다는 핑계로 연회장을 벗어나 발코니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그곳에서 마주친 것은, 홀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채령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연회장이 좀 답답해서요."

두 사람은 나란히 난간에 기대어 섰다. 아래로 펼쳐진 정원의 불빛이 은은했다. 연회장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오늘 좀 피곤해 보이십니다."

백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익숙한 일이에요, 이런 자리에서 혼자 있는 거."

채령이 애써 웃으며 답했다. 백결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익숙해질 필요 없는 것도 있습니다."

채령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백결의 시선은 이미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짧은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채령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백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는..."

채령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 연회장 안에서 유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님, 여기 계셨네요!"

두 사람은 황급히 서로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유설이 발코니로 나오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웃음 뒤로, 무언가 싸늘한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채령, 너도 여기 있었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 아래 처음으로 날카로운 것이 섞여 있었다. 채령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저는 그만 들어가볼게요."

채령이 조용히 자리를 떴다. 발코니에는 유설과 백결만이 남았다. 유설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저희도 들어가요, 기사님. 아버지가 찾으실 거예요."

백결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잠시, 채령이 사라진 방향에 머물러 있었다.

2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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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에서는 유설의 불안이 본격적으로 자라나며, 도진이 마침내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02화 끝

다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