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번 남작가의 저택은 왕도에서 마차로 사흘 거리에 있는, 변경과 수도의 경계쯤에 자리한 영지였다. 저택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대대로 이어져 온 가문의 격식만큼은 왕도의 어느 저택에도 뒤지지 않았다. 정원의 장미 넝쿨은 계절마다 정확히 손질되었고, 복도의 촛대는 하나같이 같은 각도로 걸려 있었다. 그 정돈됨은 완벽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결벽에 가까웠다.
그 완벽한 질서 속에서, 진채령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존재했다.
그녀는 레이번 남작의 둘째 딸이었다. 다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저택 안에 몇 없었고, 알더라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한때 이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였다. 남작의 눈에 들어 잠시 그의 곁에 머물렀지만, 정식 부인이 되지는 못한 채 채령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 남작은 최소한의 도리로 그녀를 저택에 들이고 "둘째 아가씨"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그 이상의 애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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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채령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정원으로 나갔다. 저택 사람들이 눈을 뜨기 전,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이슬 맺힌 장미 넝쿨 사이를 거닐며, 그녀는 손끝을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다.
손끝은 종종 이유 없이 뜨거워졌다. 어릴 적에는 열병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녀는 그것이 몸의 병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아갔다. 화가 날 때, 슬플 때,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손끝에서 옅은 빛이 아른거렸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이 저택에서 하린뿐이었다.
"채령, 너 오늘도 정원에 나와 있었니?"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설이었다.
레이번 남작의 첫째 딸이자, 이 가문의 유일한 정식 후계자. 그녀의 어머니는 왕도의 유서 깊은 백작가 출신으로, 남작과의 결혼 역시 양가의 격에 맞는 정식 혼사였다. 유설은 태어날 때부터 이 저택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고, 채령은 그저 그 곁에 존재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네, 언니."
채령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유설은 채령의 곁으로 다가와 장미 넝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장미는 손대지 마. 네 손 닿은 꽃, 아버지가 싫어하시는 거 알잖아."
그 말에 특별히 날이 서 있지는 않았다. 유설은 그저 사실을 말하듯 담담하게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무심함이야말로, 채령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미움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상대가 자신을 미워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는 무심함이었다.
"...조심할게요."
유설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채령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끝에 남은 옅은 열기를 소매 속으로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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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또 그러고 계세요."
하린이 다가와 채령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채령이 태어날 때부터 곁을 지켜온 시녀였다. 정확히는, 채령의 어머니를 모셨던 유모의 딸로, 두 사람은 자매처럼 자라온 사이였다. 이 저택 안에서 하린만이, 채령을 "아가씨"가 아니라 진심으로 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괜찮아. 이제 익숙해."
"익숙해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 건."
하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채령을 향한 걱정과, 유설을 향한 옅은 서운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 곧 손님도 오신다면서."
채령이 애써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왕도에서 기사님이 오신다고 했죠. 유설 아가씨 혼담 때문에."
채령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혼담?"
"네. 왕국 기사단 소속인데, 이번에 남작님께서 유설 아가씨와 혼사를 논의해보고 싶어 하신다고. 저택 사람들 사이에서도 꽤 소문이 자자해요. 왕도에서도 이름난 실력자시라고."
채령은 별다른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것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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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저택 앞마당에 마차 바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집사와 하인들이 서둘러 정렬해 손님을 맞을 채비를 했다. 마차 문이 열리고, 은빛 갑옷을 갖춰 입은 젊은 기사가 내려섰다. 큰 키에 절제된 동작,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을 듯한 인상이었다. 그의 뒤로 짐을 든 종자가 따라 내렸다. 강태오였다.
"레이번 남작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백결 경."
집사가 정중히 맞이했다. 백결이었다. 왕국 기사단 소속의 젊은 기사로, 이번 방문의 표면적인 명분은 인근에서 보고된 정체불명의 짐승 출몰을 조사하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따로 있었다. 레이번 가와의 혼사 논의였다.
유설은 이미 한껏 꾸민 채 현관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백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며칠 밤을 설렘 속에서 보낸 참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유설이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백결은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표정에는 특별한 감흥이 담겨 있지 않았다. 유설은 그런 그의 모습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 듯, 자연스럽게 그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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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령은 그날, 저택 뒤뜰에서 장작을 정리하다 우연히 마차가 도착하는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저 사람이 유설 아가씨 혼담 상대예요?"
하린이 옆에서 목을 빼고 구경하며 물었다.
"그런가 봐."
"잘생기긴 했네요."
"...그런가."
채령은 별다른 관심 없이 대답하고는 다시 장작더미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는 그 저택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 강 건너 불구경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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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만찬 자리, 커다란 식탁 위로 촛불이 은은하게 빛났다. 채령은 늘 그렇듯 말석에,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백결은 유설의 옆자리, 남작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제 둘째 딸입니다."
남작이 채령을 향해 형식적으로 손짓하며 소개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온도는, 유설을 소개할 때와 확연히 달랐다.
백결은 예의상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진채령입니다."
채령이 작게 인사했다. 백결 역시 짧게 목례했을 뿐, 그 이상의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특별한 시선도, 감정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저택의 손님과, 저택의 그늘 속 존재가 형식적으로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유설은 그런 백결의 곁에서 시종일관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기사님, 왕도 생활은 어떠세요? 저도 언젠가 왕도에 가보고 싶어요."
"...기회가 되면 좋은 곳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백결의 대답은 예의 바르되 담백했다. 유설은 그 담백함조차 설렘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식탁 아래에서, 그녀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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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이 끝난 뒤, 채령은 홀로 정원을 거닐었다. 밤공기가 유독 차가웠다. 낮 동안 억눌러온 마음이, 홀로 있는 이 시간에야 비로소 풀어지는 듯했다.
"이곳에 계셨군요."
낯선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백결이 서 있었다. 그는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듯, 코트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죄송합니다. 방해가 되셨다면."
채령이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비키려 하자, 백결이 짧게 말했다.
"아뇨, 그냥 걷던 중이었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두 사람은 잠시 어색한 침묵 속에 나란히 섰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채령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백결은 정원 너머 어둠을 바라보았다.
"이 저택, 밤에는 유독 조용하군요."
백결이 먼저 침묵을 깼다.
"...낮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채령이 작게 답했다. 그 말에 담긴 것이 단순한 사실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백결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몇 마디를 더 주고받다가, 이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채령은 예의상 목례를 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백결 역시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특별할 것도, 설렐 것도 없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두 개의 그림자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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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저택 가장 깊은 곳 서재에서는 유설이 홀로 촛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낡은 초상화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백결이 아직 소년이었을 적, 왕도의 사교 모임에서 우연히 스친 뒤로 줄곧 마음에 품어온 얼굴이었다.
그때 그는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유설에게는 그 짧은 스침이 몇 년을 이어온 마음의 시작이었다.
"드디어... 이 저택에 오셨네."
유설은 초상화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 기다림 끝의 설렘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설렘 한편에는, 이미 조금씩 다른 감정이 자라고 있었다. 만찬 자리에서 아버지가 지나가듯 채령을 소개하던 순간, 백결의 시선이 아주 잠깐 채령에게 머물렀던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인 시선이었을 뿐인데도, 유설의 마음속에는 이유 모를 불편함이 자리 잡았다. 그녀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괜한 생각이겠지."
그녀는 초상화를 서랍에 넣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러나 그 밤, 그녀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창밖 어둠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그녀의 방을 오래도록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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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끝. 백결과 채령의 만남은 이렇듯 아무 감정 없이 시작된다. 다음 장부터, 저택에서의 시간이 쌓여가며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조금씩 균열 같은 감정이 스며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