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밤, 백결은 채령에게 하도영과 나눈 이야기를 어디까지 전할지 고민하다 결국 절반만 꺼내기로 했다. 조직에 대한 것, 그리고 봉인술이라는 단어까지만.
"봉인술사 가문." 채령이 그 말을 되뇌었다. 눈빛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아는 단어야?"
"모르겠어. 근데 왠지—" 그녀는 눈을 감았다. 뭔가를 애써 붙잡으려는 표정이었다. "할머니가 그런 얘길 한 적 있는 것 같아. 우리 집안에, 뭔가 오래된 물건이 있다고.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고."
백결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무슨 물건인데."
"기억이 안 나. 그냥 느낌만 남아 있어. 되게 오래된, 나무 상자 같은 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채령은 답답한 듯 이마를 짚었다. "왜 이렇게 조각조각인 걸까. 남들은 다 기억하는데 나만 이런 식이야."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어. 강한 충격을 받으면 기억이 파편화되는 경우가 있거든."
채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 물건이 이 사건이랑 관계있는 걸까."
"확신은 못 해. 근데 조직이 노리는 게 봉인술 관련 유물이라면, 너희 집안이랑 연결될 가능성은 있어."
침묵이 흘렀다. 채령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만약에 그 물건 때문에 내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죽은 이유가 그 낡은 상자 하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무리 곱씹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백결은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짚으려다, 손이 그대로 통과하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순간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미안." 그가 손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채령은 옅게 웃었다. "괜찮아. 익숙해. 그리고—"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그래도 그렇게 손 뻗어준 거, 처음이었어."
백결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했다. 그 스스로도 방금 그 행동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백결은 계속 그 장면을 곱씹었다. 손이 통과했던 순간의 허탈함,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채령의 옅은 웃음.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사건 관계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 또 눈을 내리깔라고 했겠지.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말을 따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